1920년대 전기의 한 시인은 ‘아시아의 밤’을 노래했다. 이 아시아라는 이름은 불행히도 본래의 의미가 아닌 이름이지만 18세기 이래로 서구 세력으로부터 야만 혹은 절망의 야만으로 규정된 아시아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는 서구중심사관의 사생아의 이름이기도 했다. 정작 이 시기의 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수난의 과정에서 근대를 경험하게 된다. 온갖 고통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세계경제의 새로운 가능성을 담보하고 21세기에 접어들면 세계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주축이 되고 있다.

 아시아는 누구인가, 아시아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은 이런 과정을 거슬러 오르기도 할 것이다.
 지금 유럽은 유로화폐를 공용한다. 영국과 스웨덴 등 몇 나라의 고유화폐 말고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하나의 화폐로 통일되어 있다. 그 유로화는 미국의 세계 제패의 무기인 달러의 시장능력보다 질적으로 우위를 자리 잡게 되기까지 했다.
  화폐란 일정한 물체 따위를 사용하며 그 이전의 물물교환보다 편리한 유통으로 사회통합을 발전시켜 왔다. 그것은 물품의 교환가치 뿐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회나 국가의 정신을 표상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 원화에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고 일본 돈에 작가의 초상이 인쇄되고 미국의 달러화에 ‘건국의 아버지’가 의젓이 앉아있는 것이다.

  몇 해 전 내가 체코 프라하 문학축제에 아시아 시인으로 초청되었을 때 내가 막 유럽 화폐 통합으로 인한 유럽공동체가 실현되는 것을 근대국민국가의 배타적 관계를 극복하는 한 시범이라고 하자 나를 인터뷰하던 그곳 신문 편집자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내가 써온 돈이 없어진다는 것은 나 자신이 없어진다는 뜻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더 이상 내 주장을 되풀이 하지 않았으나 국가라는 제도가 사라질 때의 정치적 향수에도 불구하고 국가들이 서로 어우러져 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낸 상상력은 폐기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아직도 내 한쪽 호주머니에 들어있다.
  지금 유럽은 유럽헌법을 통과시키기 직전에 있다. 지난해의 통과가 좌절된 채 다시 그 속전을 재가동하는 중이다.
  이 유럽의회와 유럽경제의 통합적 역할은 나날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런데 장차 통과될 유로헌법 전문 초안에는 ‘신(神)’이 없다. 유럽은 어디인가. 기독교의 고대 중세 근세가 만들어낸 문명의 선진지역이 아닌가. 유럽의 어느 도시나 어느 마을이나 그 중심은 교회가 아닌가. 유럽 어느 국가 헌법도 이 ‘신’을 전제해 왔다.
  그런 지역의 정신적 헌장(憲章)으로서의 ‘신’ 개념을 단호하기 폐기함으로써 여러 ‘이단’ 국가들의 동참에 길을 터준 그 대담한 개방성에 놀라기 십상이다.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가 부시정부의 명분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그곳 젊은이들은 미국헌법의 전문이든 조문이든 거기에 ‘신’이란 단어와 ‘결혼’이란 단어를 삭제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유럽이나 미국사회의 본래성 혹은 가치관은 다자관계로서의 삶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구가 동구의 낙후된 지역을 소외시키지 않은 점은 대승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이런 유럽공동사회에 질세라 미국도 북아메리카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드는 자유무역을 통해 더 거대한 지배논리의 장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경계태세는 남아메리카 라틴문화권역의 지역통합을 가속화시키기도 한다. 서구 제국주의의 철저한 희생물인 아프리카는 인류사의 시원이란 명예 따위는 간데없이 유럽 세력의 각축으로 인해 공동사회가 파괴되고 그들의 자연부락생활권역이 서구의 이익에 의해 분할됨으로써 현재의 내전이나 갈등을 지속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는 중동의 그칠 줄 모르는 불화와 종파투쟁도 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 이후의 영미가 이 지역을 농간한 분리통치로 악화된 사태들이다.  한 역사가는 인류의 선사시대는 낙관이지만 인류의 역사시대는 비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 그대로 아프리카는 유럽에 의해 유린되고 수탈되고 타자화된 상태에서 오늘의 불행을 막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각성되고 있다. 프란츠 파농의 반서구노선이나 아프리카단결기구와 같은 그들 공동의 연대의 꿈은 언젠가는 유럽의 나쁜 유산을 청산할 때를 기대한다.

  아시아 역시 동남아시아가 그들의 경제공동체를 지향함으로써 오늘의 아태 연안의 국제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동부아시나 내지 동아시아는 서구화의 일본국국주의가 저지른 이 지역의 침략이라는 현대사의 모순에 의해서 그것의 실현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독일의 진지한 반성에 비하면 일본은 한 가닥 반성조차도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들의 행태를 왜곡하고 미화하고 있다. 이럴 경우 동부아시아에서는 기껏해야 바둑의 동양3국이나 한, 중, 일의 친선경기 따위로 동부아시아라는 지역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추상인지 모른다. 지난 해 나는 한 외국잡지 연속특집 ‘아시아는 있는가’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다음은 그 개략이다.

  ‘아시아란 누구인가. 해가 뜨는 아시아란 누구란 말인가.
  이른바 서구중심사관의 객체일 뿐인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트’도 거의 연고지인 중동을 얼마나 초월해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 중동에서 이쪽 동아시아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풍경은 시베리아에 대하여 무엇인가. 동쪽 반도와 서쪽 카스피해 흑해와의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가능한가.
  근대지도 위에서 아시아란 이토록 어떤 동질성도 결여된 채 펼쳐지고 있다. 오랜 지리멸렬의 건축도면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지난 세기말 동구 소련 붕괴 이후 하나의 시대 담론으로 나타난 동아시아 또는 동북아시아 연대란 이런 아시아 공간에서 얼마나 허위의식을 떨쳐버릴 수 있는가. 그것은 성급한 수락이 아니면 공론이 아니겠는가.
  현재 한국과 일본, 일본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는 섬의 영유권문제가 있지 않은가. 중국, 필리핀, 베트남도 그렇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중국은 서북동정과 함께 동북공정으로 한국의 고대사를 탈취해가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한반도 북부를 속속 중국화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동북아시아에서 아시아라는 말은 어떤 화음을 필요로 하는가.
  실제로 동아시아는 영속되는 중화주의와 영속되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야망이 충돌하는 것으로 요약되는 것은 아닌가.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망령이 떠도는 것은 아닌가. 일미군사동맹은 무엇인가.
  이 지역에서의 갈등과정을 지나 얻어낼 하나의 창조적 합의는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고대 그리스신화에서의 ‘아시아’, 셈족의 ‘아시아’는 앞으로 지구 규모의 웅대한 문화연방시대를 불러일으킬 수 없는 것인가. 아시아에서도 아시아 화폐통일의 제안에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 않은가.’

  아시아는 지구상의 육지 면적 30프로를 차지하는 광대한 지역을 말한다. 한반도의 약 2백배이다. 아시아 동과 서의 시차는 11시간이다. 그래서 지구의 24분의 11에 걸쳐 분포한 시간의 공간을 아우르고 있다. 세계 최대의 대륙이다.
  아시아는 에우로페(유럽)이라는 여신의 대칭인 아시아라는 여신의 이름이라고 그리스 신화는 알려준다. 이는 아수(asu: 동쪽)라는 앗시리아어에서 유래된 것이 그리스로 건너간 것이리라.
  이에 앞서 ‘동쪽’은 ‘해돋이’를 동시에 뜻하고 있다. 이것이 뒷날 라틴어의 ‘동쪽(오리엔트)’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서양의 시작이라는 그리스의 방향감각에서 아시아는 동방의 시작이 되었다. 바로 이 오리엔트라는 배타적 방향으로 시야가 연장되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는 ‘바로바로’ - 개굴개굴, 꿀꿀, 멍멍멍 따위와 같은 - 라는 소리로 말하는 야만인 바로바로스(바바리아)는 끝내 오늘의 동아시아와 태평양 서쪽연안지역에 이르는 유라시아대륙 대부분을 망라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를 유럽의 시작이라고 확신하는 일이 허구라는 연구가 활발하다. 아테나는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는 페니키아와 이집트 그리고 인류최초의 역사를 전개한 수메르를 받아들인 동방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유대신화도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신화의 전래라는 것이나 근대유럽이 만들어낸 그리스문명=서구문명의 정설은 의심받고 있다.
  아마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 의해 멸망한 페루시아로서 오리엔트문명의 불빛은 꺼지게 되있는 것이리라. 그 전쟁으로부터 2천구백년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4천8백여 년 전 수메르는 세계최초의 신화, 최초의 문명, 최초의 국가, 그리고 최초의 서사시를 가지게 된다.
  그 서사시는 호메로스의 ‘일리어스’와 ‘오디세이아’보다 오천년이나 앞선 것이다. 거기에 땅끝이 나타난다. 그것은 수메르 지역이 뒷날 유럽인으로 하여금 아시아라 지정한 곳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더 동쪽의 땅끝은 아마도 아랍해나 인도양쯤 될지 모른다.
  그만큼 아시아는 하나의 이름이나 개념으로 부를 수 없는 세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시아는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세계이다라고 말해도 된다. 그것은 서구 중심사관의 한 대상이나 객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더 높은 단계의 문화개념일 것이다.
  아시아의 다인종, 다종교, 다문화의 복합성 및 이질성들이 이미 아시아를 하나의 명확한 개념으로 해석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아시아는 처음부터 집합명사로서의 ‘아시아들’일 것이다.
  과연 아시아는 세계 속의 한 지역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세계이다. 그 세계를 한 단수(單數)의 지역으로 개념화하는 일이 얼마나 허황한가를 보여주고도 남는 세계인 것이다.
  유럽은 고대 그리스문명 및 헬레니즘의 지적 전통을 내세우지만 중세 보편주의로서의 기독교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그것은 같은 기독교지역인 스페인이 피레네 산맥으로 막힌 반면 프랑스 보르도지방에서 동쪽 러시아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거의  지평선으로 이어졌다는 자연환경에서도 하나의 통합적 공간을 가능케 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그런 유럽의 외부로서 접촉한 동방의 이슬람이나 그 밖의 사상과 신앙에의 차별화로서의 타자가 있다. 타자는 자아를 더 강건하게 만들고 자아의 경계를 쌓아올린다.
  이런 유럽의 외부로서의 아시아는 어떤 것인가. 아시아라는 이름 자체가 유럽이 그들의 항해시대 이전부터 만나기 시작한 그들의 외부가 점점 확대된 것을 뜻한다. 대서양의 한 곳을 인도로 착각한 사실도 그런 자기 확대를 통해 나온 희극일 것이다.
  아시아는 가령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통일될 수 없는 복잡한 세계이다. 누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이슬람과 힌두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유교, 도교, 샤머니즘 등 수많은 종교들이 이 지역에 유통되거나 정착하고 있다. 아니 고대인도에는 6대 사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상의 성좌의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오늘날의 유물사관의 원형도 그런 별들의 하나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란 그런 별들을 극복하거나 종합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지역을 아시아라는 단일논리로 유럽이나 그 밖의 지역에 대응하는 것은 오류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오늘날 아시아담론은 우리가 아시아를 어떻게 이해하지 못하는가에서 출발해야 할 이유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시아는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방법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과 연결된다.
  아시아의 근대는 서구의 근대를 수용하고 있다.
  물론 근대 동부아시아에서는 자생적이며 내재적인 근대의 가능성을 그들의 봉건사회에의 성찰로부터 내보이고 있었으나 이는 서구의 동양경영이라는 제국주의를 통해서 근대 이전과 그 이후가 나누어진다.
  여기에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복제하는 과정으로서의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방이나 복제로 끝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서구의 아시아관에 종속되는 자아상실을 가져오기도 한다.  굳이 이런 상태에서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 한국은 동도서기(東道西器),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구호를 내세워 합리화한다. 여기에서도 한국을 제외하면 중국 역시 아시아의식이나 동양의 자기정체성 따위를 내걸지 않고 오직 중화국의 자체만을 강조하고, 일본 역시 아시아로부터 탈출한 일본정신으로서의 서구화를 지향하고 있다.
  말하자면 아시아는 아시아를 하나의 실천명제로 공유하지 않고 국사관의 명분과 실리에만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지역에서 동아시아 담론은 그것이 얼마나 낯선 것이며 실현되기 어려운 것인가라는 실감으로부터 아시아에의 각성이 있다는 역설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담론으로서의 아시아에 대한 각성은 분명히 아시아의 자기발견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여기에서 근대의 초극이라는 아시아적 가능성이 나올 것이다. 아시아는 누가 침략하는 공간, 누구의 소비시장이나 생산재 수탈을 위한 공간개념이 아니라 이제까지 근대의 서구화 과정을 통해서 성찰된 자신의 사상적 근거로서의 아시아를 지향하는 것이다.
  고로 아시아는 이 지역의 각각의 다양한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 역사적 개념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서구의 타자인 아시아가 아닌 우리 자신으로서의 아시아라는 자화상을 그려내게 된다.
  과연 식민지시기의 한국시인이 ‘아시아의 밤’을 비장하게 노래하기 훨씬 이전에 영국시인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는 세계문학의 고전이라는 그의 서사시 ‘아시아의 빛’에서 다원주의의 열린 사고방식으로 하여금 불교를 예찬하고 있다.(그것은 몇백만부가 팔리고 6개 국어로 번역되고 30년간 오페라로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공연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는 다윈, 헉슬리, 스펜서, 밀 등과의 우정을 이룬 빅토리아시대의 지적 화신이기도 하다.)
  18세기 이래의 서구중심사관은 그들의 아시아 지배에 대한 반성인 것처럼 아시아의 사상, 종교, 문화 및 다양한 전통가치들에의 경이적인 숭배가 일어났다. 프랑스 역사학자 미슐레는 심지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좁다. 그리스는 작아서 숨이 막히고 유럽은 메말라서 숨이 찬다. 저 고고한 아시아를, 심원한 동양을 조금만이라도 바라본다면’이라고 외쳤다. 또 다른 역사가는 ‘그리스와 로마보다 더 심원하고 더 철학적이고 더욱 시적인 고대’를 아시아에서 발견하고 있다.
  아니 니체는 그의 영겁회귀사상의 씨앗을 인도의 윤회사상에서 틔웠고 그 자신 ‘서양의 부처’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가 예언하기를 유럽적 불교가 필요불가결하게 될 것이라며 오늘의 서구풍토를 미리 내다보기까지 한 것이다.
  이런 아시아에의 회귀는 19세기 이래 유럽의 새로운 사상에 점화되었으나 여전히 그들은 아시아의 여러 인종과 낙후된 생활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오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
  그 둘은 결코 만날 수 없으리
  신의 위대한 심판의 자리에
  하늘과 땅이 반드시 서게 될 때까지는

  이 키플링의 시는 동양을 유럽의 대륙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신과 인간, 하늘과 땅의 이분법으로 노래한다. 샤또브리앙은 십자군은 침략이 아니라 ‘반격’이고 ‘해방’이라고 강변한다. 동양인은 정복될 필요가 있으며 서양인에 의한 동양정복은 근대성이라고 하는 논리에 아무런 모순도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상의 여러 지적에 대해서 편협한 시각이 아니라 그들의 다양한 목소리에 새삼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 뒤로 우리 자신이 이런 서구의 문화적 상황에 익숙해진 ‘우리 자신으로서의 서구’를 어떻게 초극할 수 있는가를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서 우리가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을 수는 없다.(나는 개량한복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가 머리를 땋고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살 수도 없다.
  분명한 것은 근대교육으로서의 서구형식과 어떻게 나 자신의 동양적인 것 내지 동아시아적인 가치를 자기화할 수 있는가, 아니 이미 근대화된 나를 어떻게 나 자신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이 세계화의 시대를 관통할 것인가.
  세계화라는 말은 우리가 남용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를 제거하는 일방화, 일률화인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아시아는 새로운 실체로 전환할 수 있다. 동아시아이든 서아시아이든 중앙아시아이든 앞으로 연대하지 않는다면 세계지배논리 앞에서 자기중심이 아니라 이웃과 타자들을 상대화함으로써 하나의 공동 상생체를 만들어내는 ‘차이들의 합동’이야말로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이제 아시아는 각자들만의 내부적 존재가 아니라 각자들의 외부적 관계인 것이다.
  히말라야는 중국과 인도의 경계가 아니다. 몸을 가볍게 만든, 히말라야 작은 티벳에서 인도로 날아가는 제트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다. 황해는 한국, 일본, 중국의 영해가 아니라 다국적 관계의 공해이며 지중해인 것이다. 지중해란 하나의 이기주의, 하나의 역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럿의 삶과 문화가 만나는 장소이다.
  스페인은 고대 페니키아와 로마와 이슬람과 기독교의 여러 문명이 다층을 이루고 있다. 한국은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불교와 유교, 도교, 그리고 근대 기독교에 이르는 역사 속의 중층을 이루고 있다.
  저 고대 당나라는 수많은 종교와 사상, 수많은 다른 문명들이 공존했던 곳이다. 이백은 페르시아 여자가 술을 파는 술집에서 크게 취했다.
  아시아는 이처럼 풍부한 문화텍스트의 세계이다. 지금 세계정신은 동양정신으로부터 더 높은 단계의 문화를 요청하고 있다. 동양 역시 서양으로부터 얻은 것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는 근대 아시아로부터 근대 이후의 아시아로서 세계사에의 찬란한 기여를 하는 힘의 복합 생명체이다.

Posted by 백구씨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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