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가(郭嘉) 봉효(奉孝) 170~ 영천(潁川) 양척(陽戚) 사람
위(魏)의 모사. 조조(曹操)가 가장 아끼던 일급참모로 관직은 군제주(軍祭酒)였으며 시호는 정후(貞侯)였다. 조조의 하북정벌중 요동의 사막길에서 병을 얻어 치료 중 요절(38세)했다. 그리나, 유서에서 원희(袁熙), 원상(袁尙)형제의 죽음을 예측했다. 적벽 싸움에서 패전한 후, 조조는 '곽가가 있었더라면...'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제갈량(諸葛亮) 공명(公明) 181~234 낭야 양도현 사람
한나라 사례교위 제갈풍의 후손이었다. 윤건(倫巾)을 애용하고 우선(羽扇)을 들어 신선처럼 행동했다. 남양땅에 엎드려 밭 갈며 나아가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아 사람들은 복룡(伏龍)이라 불렀는데 와룡강(臥龍江)이라 불리는 곳 주변에 융중(隆中)에 살아서 와룡선생이라고도 불리었다. 유비(劉備)의 극진한 정성이 담긴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감동하여 세상에 나와 한 평생을 유비, 유선(劉禪) 두 주인을 섬기며 노력한 결과 촉나라 기업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의 동남풍(東南風)과 10만개의 화살, 화용도(華容道)의 예언등이 삼국연의에 나타난다. 형주(荊州)를 계교로 취한것, 주유(周瑜)를 약올려 죽인것, 서천(西川) 점령, 한중(漢中) 점령, 팔진도(八陣道), 칠종칠금(七從七擒), 만두(饅頭), 읍참마속(泣斬馬謖), 수어지교(水魚之交), 목우유마(木牛流馬), 축지법(縮地法), 출사표(出師表),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죽은 뒤에 사마의(司馬懿)를 달아나게 한 것, 위연(魏延)을 금낭으로 참한것, 다량 화살인 연노법(連努法) 등의 이야기도 전해지나 알 수는 없다. 법가(法家)를 바탕에 두고 안국(安國)의 선정을 실시하고 유비 사후 여섯 번을 기산(祈山)에 나아가 힘껏 싸우나 모두 실패하고 오장원(五丈原) 군중에서 54세로 죽는다. 관직은 군사(軍師),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 익주목(益州牧).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이다.
순유(荀攸) 공달(公達) 157~ 영천 사람
순욱(荀彧)의 종제. 관직은 상서령(尙書令)을 지냈다. 외우내현(外愚內賢)하였고 계모(計謀)가 많았다. 조조(曹操)를 따라서 정벌에 참가하여 기발한 공을 많이 세운다. 후에 조조의 위왕(魏王) 등극을 반대하다가 미움을 받아 58세로 죽었다.
순욱(荀彧) 문약(文若) 163~ 영천(穎川) 영음(穎陰) 사람
조조(曹操)의 모사. 왕좌(王佐)의 재질을 가진 인물로 조조를 따라 출정하여 많은 공을 세운다. 유비(劉備)와 여포(呂布)를 이간질하기 위해 이호경식(二虎競食), 구호탄랑(驅虎呑狼)등의 말을 한 인물로 관직은 시중(侍中), 광영대부(光榮大夫)에 이르렀다. 조조의 구석(九錫)을 반대하다가 미움을 사 자결(50세)하였다. 한때는 조조가 '나의 자방(전한의 명군사 장량을 말함)' 이라고도 평한 인물이다.
전풍(田豊) 원호(元皓) 162~ 거록(鉅鹿) 사람
원소(袁紹)의 별가(別駕)로 훌륭한 계책을 많이 헌납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소(袁紹)가 관도에서 패하자 장수, 군사들이 전풍에게 계책을 물으라고 하였으나 그것을 시기한 봉기(逢紀)가 참소하여 노한 원소가 그를 자살하게 만들었다.
방통(龐統) 사원(士元) 178~213 양양(襄陽) 사람
유비(劉備)의 부군사(副軍師)로 시호는 정후(靖侯)였다. 일찌기 수경선생 사마휘(司馬徽)가 남주지사(南州之士)의 첫째라 불렀고 봉추(鳳雛)라 불리며 와룡공명(臥龍孔明)과 이름을 떨쳤다. 적벽대전(赤壁大戰) 때 주유(周瑜)의 부탁을 받고 조조를 꼬여 연환계(連還計)를 성공시켰고 서서(徐庶)에게 계책을 주었다. 후에 노숙(魯肅)과 제갈량(諸葛亮)의 천거로 유비의 군사가 되어 서천 정벌에서 큰 공을 세운다. 이의(李薏)의 예언 대로 낙봉파(落鳳坡)에서 장임(張任)의 난전을 맞고 36세로 요절했다. 용모와 재능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음을 증명한 인물로 꼽힌다.
정욱(程昱) 중덕(仲德) 141~ 동군(東郡) 동아(東阿) 사람
조조(曹操)의 모사로 관직은 위위(衛尉)에 올랐으며 순욱(荀彧)의 천거로 조조(曹操)를 따라 여러차례 종군하여 좋은 계책을 많이 헌납하였다. 서서(徐庶)가 유비를 떠나게 할 수 밖에 없는 거짓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연주를 빼앗겨 의기소침해진 조조를 격려해 창정 싸움에서 '십면 매복의 계'를 사용하여 원소를 쳐부수는 등 순욱과 같이 조조를 보좌했다. 권모술수에 능했고, 사태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뛰어난 인물로 병사했다.
유엽(劉曄) 자양(子陽) 171~ 회남(淮南) 성덕(成德)사람
위(魏)의 모사로 고양왕 유연의 후예이다. 대홍(大鴻)려, 동향후에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일경(日景)이다. 곽가의 추천으로 조조(曹操)를섬기게 되었으며 좋은 계책을 많이 내놓았는데 원소와의 싸움에서 발석차를 고안해 낸 것도 유엽이었다. 권모술수에 능하고 계략에 밝아 삼대에 걸쳐 조씨의 위를 섬기다 병사했다.
노숙(魯肅) 자경(子敬) 172~217 임회(臨淮) 동성(東城) 사람
오(吳)의 일급 모사로 사람됨이 온화했다. 주유(周瑜)의 천거로 손권(孫權)에게 발탁되었다. 유비(劉備)에게 여러번 사신으로 자청할 정도로 친유비파였다. 적벽대전(赤壁大戰) 때에는 주전파로 제갈량(諸葛亮)과 주유사이에서 다리 관계를 하였다. 주유가 죽은 후 오나라 대도독(大都督)이 되어 관우(關羽)와 형주의 삼군 문제로 대립하였다. 관로(菅輅)의 예언대로 육구(陸口)를 지키다 병사하였다.
주유(周瑜) 공근(公瑾) 175~210 여강(廬江) 서(舒)성 사람
손책(孫策)과 죽마지우(竹馬之友) 사이였다. 젊어서부터 도략이 넓고 장수재목이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수전(水戰)에 능했으며 손책이 강동을 차지했을 때 이미 건위중랑장(建威中郞將)을 맡고 있었다. 손책의 사후 병권을 잡고 적벽에서 조조(曹操)를 화공(火攻)으로 대파시켜 이름을 크게 떨쳤다. 유비(劉備)를 경계하며 미인계(美人計)를 쓰기도 하고 제갈량(諸葛亮)과 대립한다. 젊은 나이인 36세로 요절하였는데 강동의 절색인 소교(小喬)의 남편이었다. 죽으면서 '하늘은 왜 주유를 탄생시키고 또 제갈량을 탄생시켰나?' 라는 말이 삼국연의에 전한다. 용모가 수려하여 '미주랑'이라고도 불리었다.
위(魏)의 모사. 조조(曹操)가 가장 아끼던 일급참모로 관직은 군제주(軍祭酒)였으며 시호는 정후(貞侯)였다. 조조의 하북정벌중 요동의 사막길에서 병을 얻어 치료 중 요절(38세)했다. 그리나, 유서에서 원희(袁熙), 원상(袁尙)형제의 죽음을 예측했다. 적벽 싸움에서 패전한 후, 조조는 '곽가가 있었더라면...'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제갈량(諸葛亮) 공명(公明) 181~234 낭야 양도현 사람
한나라 사례교위 제갈풍의 후손이었다. 윤건(倫巾)을 애용하고 우선(羽扇)을 들어 신선처럼 행동했다. 남양땅에 엎드려 밭 갈며 나아가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아 사람들은 복룡(伏龍)이라 불렀는데 와룡강(臥龍江)이라 불리는 곳 주변에 융중(隆中)에 살아서 와룡선생이라고도 불리었다. 유비(劉備)의 극진한 정성이 담긴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감동하여 세상에 나와 한 평생을 유비, 유선(劉禪) 두 주인을 섬기며 노력한 결과 촉나라 기업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의 동남풍(東南風)과 10만개의 화살, 화용도(華容道)의 예언등이 삼국연의에 나타난다. 형주(荊州)를 계교로 취한것, 주유(周瑜)를 약올려 죽인것, 서천(西川) 점령, 한중(漢中) 점령, 팔진도(八陣道), 칠종칠금(七從七擒), 만두(饅頭), 읍참마속(泣斬馬謖), 수어지교(水魚之交), 목우유마(木牛流馬), 축지법(縮地法), 출사표(出師表),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죽은 뒤에 사마의(司馬懿)를 달아나게 한 것, 위연(魏延)을 금낭으로 참한것, 다량 화살인 연노법(連努法) 등의 이야기도 전해지나 알 수는 없다. 법가(法家)를 바탕에 두고 안국(安國)의 선정을 실시하고 유비 사후 여섯 번을 기산(祈山)에 나아가 힘껏 싸우나 모두 실패하고 오장원(五丈原) 군중에서 54세로 죽는다. 관직은 군사(軍師),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 익주목(益州牧).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이다.
순유(荀攸) 공달(公達) 157~ 영천 사람
순욱(荀彧)의 종제. 관직은 상서령(尙書令)을 지냈다. 외우내현(外愚內賢)하였고 계모(計謀)가 많았다. 조조(曹操)를 따라서 정벌에 참가하여 기발한 공을 많이 세운다. 후에 조조의 위왕(魏王) 등극을 반대하다가 미움을 받아 58세로 죽었다.
순욱(荀彧) 문약(文若) 163~ 영천(穎川) 영음(穎陰) 사람
조조(曹操)의 모사. 왕좌(王佐)의 재질을 가진 인물로 조조를 따라 출정하여 많은 공을 세운다. 유비(劉備)와 여포(呂布)를 이간질하기 위해 이호경식(二虎競食), 구호탄랑(驅虎呑狼)등의 말을 한 인물로 관직은 시중(侍中), 광영대부(光榮大夫)에 이르렀다. 조조의 구석(九錫)을 반대하다가 미움을 사 자결(50세)하였다. 한때는 조조가 '나의 자방(전한의 명군사 장량을 말함)' 이라고도 평한 인물이다.
전풍(田豊) 원호(元皓) 162~ 거록(鉅鹿) 사람
원소(袁紹)의 별가(別駕)로 훌륭한 계책을 많이 헌납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소(袁紹)가 관도에서 패하자 장수, 군사들이 전풍에게 계책을 물으라고 하였으나 그것을 시기한 봉기(逢紀)가 참소하여 노한 원소가 그를 자살하게 만들었다.
방통(龐統) 사원(士元) 178~213 양양(襄陽) 사람
유비(劉備)의 부군사(副軍師)로 시호는 정후(靖侯)였다. 일찌기 수경선생 사마휘(司馬徽)가 남주지사(南州之士)의 첫째라 불렀고 봉추(鳳雛)라 불리며 와룡공명(臥龍孔明)과 이름을 떨쳤다. 적벽대전(赤壁大戰) 때 주유(周瑜)의 부탁을 받고 조조를 꼬여 연환계(連還計)를 성공시켰고 서서(徐庶)에게 계책을 주었다. 후에 노숙(魯肅)과 제갈량(諸葛亮)의 천거로 유비의 군사가 되어 서천 정벌에서 큰 공을 세운다. 이의(李薏)의 예언 대로 낙봉파(落鳳坡)에서 장임(張任)의 난전을 맞고 36세로 요절했다. 용모와 재능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음을 증명한 인물로 꼽힌다.
정욱(程昱) 중덕(仲德) 141~ 동군(東郡) 동아(東阿) 사람
조조(曹操)의 모사로 관직은 위위(衛尉)에 올랐으며 순욱(荀彧)의 천거로 조조(曹操)를 따라 여러차례 종군하여 좋은 계책을 많이 헌납하였다. 서서(徐庶)가 유비를 떠나게 할 수 밖에 없는 거짓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연주를 빼앗겨 의기소침해진 조조를 격려해 창정 싸움에서 '십면 매복의 계'를 사용하여 원소를 쳐부수는 등 순욱과 같이 조조를 보좌했다. 권모술수에 능했고, 사태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뛰어난 인물로 병사했다.
유엽(劉曄) 자양(子陽) 171~ 회남(淮南) 성덕(成德)사람
위(魏)의 모사로 고양왕 유연의 후예이다. 대홍(大鴻)려, 동향후에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일경(日景)이다. 곽가의 추천으로 조조(曹操)를섬기게 되었으며 좋은 계책을 많이 내놓았는데 원소와의 싸움에서 발석차를 고안해 낸 것도 유엽이었다. 권모술수에 능하고 계략에 밝아 삼대에 걸쳐 조씨의 위를 섬기다 병사했다.
노숙(魯肅) 자경(子敬) 172~217 임회(臨淮) 동성(東城) 사람
오(吳)의 일급 모사로 사람됨이 온화했다. 주유(周瑜)의 천거로 손권(孫權)에게 발탁되었다. 유비(劉備)에게 여러번 사신으로 자청할 정도로 친유비파였다. 적벽대전(赤壁大戰) 때에는 주전파로 제갈량(諸葛亮)과 주유사이에서 다리 관계를 하였다. 주유가 죽은 후 오나라 대도독(大都督)이 되어 관우(關羽)와 형주의 삼군 문제로 대립하였다. 관로(菅輅)의 예언대로 육구(陸口)를 지키다 병사하였다.
주유(周瑜) 공근(公瑾) 175~210 여강(廬江) 서(舒)성 사람
손책(孫策)과 죽마지우(竹馬之友) 사이였다. 젊어서부터 도략이 넓고 장수재목이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수전(水戰)에 능했으며 손책이 강동을 차지했을 때 이미 건위중랑장(建威中郞將)을 맡고 있었다. 손책의 사후 병권을 잡고 적벽에서 조조(曹操)를 화공(火攻)으로 대파시켜 이름을 크게 떨쳤다. 유비(劉備)를 경계하며 미인계(美人計)를 쓰기도 하고 제갈량(諸葛亮)과 대립한다. 젊은 나이인 36세로 요절하였는데 강동의 절색인 소교(小喬)의 남편이었다. 죽으면서 '하늘은 왜 주유를 탄생시키고 또 제갈량을 탄생시켰나?' 라는 말이 삼국연의에 전한다. 용모가 수려하여 '미주랑'이라고도 불리었다.